3월 들어 2주간 출장을 다녀 왔습니다.
3월말인데도 한국의 봄 날씨는 꽤 쌀쌀하더군요.

출장을 마치고 카사블랑카로 돌아오면서 인천 공항에서 핸드폰을 잃어 버릴 뻔 했습니다.  보딩을 마치고 공항내 한  커피숍(Walkerhill)에서 차를 한 잔 했습니다.
그리고 여권 심사를 마치고 면세점 들르고 탑승구까지 가서 전화를 할려고 하는데 전화기가 주머니에 없네요. 가방에 넣었나 하고 찾아 보아도 없고 아차 싶게도 전화기를 그만 커피 숍에 나두고 왔습니다.

탑승시간도 별로 안남았는데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부랴 부랴 입국심사대로 가서 밖으로 나가서 전화기를 찾아야 겠다고 했더니 심사관이 해당 항공사 직원하고 동행해서 오라고 합니다.


항공사는 대한항공이었는데 대한항공 카운터로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행을 해 달라고 했더니 일반인이 다시 입국장 밖으로 나가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하더군요.
3월29일 환승카운터에 근무를 하신 김 미X 대리님께서 친절하게 대응을 해주시더군요. 

시간이 없으니 커피숍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해보시더군요.
다행이 커피 숍에서 전화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김 대리께서 혼자서 직접 입국장 밖으로 나가셔서 전화기를 찾아다 주셨습니다. 



출장이나 여행으로 여러나라를 다녀보지만 그래도 한국의 공항과 항공사 직원들의 대 고객 서비스는 최고인것 같습니다.

덕분에 전화기도 찾고 좋은 여행 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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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소년 이었던 내가 자장면을 처음 먹어본 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인 듯 싶습니다.

 

섬에서 배를 타고 나와 10리 길을 버스를 타고 나와야 읍내에 도달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배가 크고 성능도 좋아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는데 당시에는 작은 통통선을 타고 파도가 치면 고스란히 파도를 뒤집어 쓰면서 다니던 때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에 읍내에 있던 학교에서 퀴즈대항전을 하였는데 그 퀴즈 대항전에 참가 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과 함께 읍내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참 오래 전 일입니다.

 

그때 점심 시간에 학교 근처의 중국 집에서 점심으로 자장면을 사주시던 담임 선생님이 참 그립네요.

그때 자장면을 처음 먹어 보았습니다. 참 오묘하고 신기한 맛이더군요.

당시 선생님께서 선생님 자신의 개인 비용으로 자장면을 사주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자장면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주말에 딸아이 학교에서 라바트(카사블랑카에서 100km떨어진)에 있는 학교로 축구 평가전을 하러 갔습니다.

 

아침 일찍 7 학교에서 출발하여 9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경에 경기가 마무리 된 모양입니다. 물론 딸아이 팀이 4-1로 승리를 하였다고 하네요.

 

중간에 점심 시간에 학부모님들이 코치 선생님들의 점심을 챙겨 주셨다고 하는군요.

 

한국이나 모로코나 이런 점에서는 비숫한 문화인 것 같습니다.

 

옆에 똥을 두고 음식을 먹어도 사람을 옆에 두고는 그냥 음식을 못 먹는 게 한국 사람들 심성 이지요.  그래서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지 않습니까 ?

 

모로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같이 나누어 먹고 또한 손님이 와도 일부러 따로 음식을 많이 장만해서 대접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게 사람 사는 정 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기가 다 끝나고 아이들은 학교 스쿨버스에 타고 돌아오고 학부모들은 각자 승용차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돌아오는 길에 중간에 맥도날드에 들러서 간식을 사먹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용돈을 챙겨 가서 각자 햄버거나 다른 간식을 사먹게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코치 선생님들도 함께 말입니다.

코치 선생님들이 운전 기사 아저씨에게는 햄버거를 사 주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딸 아이하고 친구 한 명은 용돈을 챙겨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내가 직접 경기를 관전하러 간 터라 따로 용돈을 딸아이에게 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같은 축구 팀인데 다른 아이들은 다 간식을 사먹고 있는데 이 두명은 용돈이 없어서 그냥 버스에 앉아서 기달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녁에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더군요. 참 어이가 없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같은 팀인데 그것도 다른 도시까지 원정게임 하러 갔는데 2명만 차에 나두고 간식을 먹은 선생님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왜 사달라고 하지 않았냐고, 내일 학교 가서 돈 갔다 드리겠다고 말씀 드리지 왜 가만 있었느냐고 딸아이에게 물어 보았지만 어린애들이 자기가 돈 없어서 못 먹는데 선생님에게 돈 빌려 달라고 할 수 있겠냐 싶더군요.

 

이 코치선생님들 모두 미국 분 들입니다.

이런 부분이 사고 방식의 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같이 운동하는 한 팀인데 이럴 수 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

 

그래서 문득 제 초등학교 때 자장면을 점심으로 사주시던 은사님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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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뉴스를 보니 어느 도에서 사철형 잔디를 도내
도로의 가로수 밑이나 해안도로, 관광지 등지에 사철잔디를 심고 점차 건물 주변까지 확대해 ‘사시사철 명품 녹색경관’을 연출하겠다는 계획아래 지역의 기후나 특성에 적합하지도 않는 품종을 선거철에 앞서 무리하게 도입해서 전시성 행정으로 예산을 낭비 할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에 보면 잔디는 여러해살이풀로 재생력이 강하고 식생교체가 일어나며, 조경의 목적으로 이용되는 피복성 식물이다. 잔디로 식생된 지표지역을 잔디밭이라고 하며, 잔디나 잔디의 뿌리로 차 있는 토양표층이나, 이식 또는 증식의 목적으로 떼어낸 토양표층의 일부를 라고 한다.

 

요즈음은 경기장에 가면 싱그러운 잔디를 많이 볼 수 있고  골프장에 가면 역시 한 겨울에도 푸르른 잔디를 잘 가꾸어 놓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골프장에는 잔디 보호를 위해 살충제를 많이 사용하는 관계로 환경오염의 많은 문제가 있지요.

 

그리고 각 가정에 있는 정원에 잔디가 있는데 여간 관리하기가 번거로운게 아닙니다.

 

건조기에는 자주 물을 주어야 햇빛에 말라 죽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키가 자라면 자주 잔디를 깎아 주어야 합니다.

잔디를 자주 깎아 주지 않으면 뿌리가 떠버려 잔디 수명이 오래 가지를 못한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관리하기에 까다로운 잔디를 조경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래도 생명력이 강하고 조경용으로도 아주 푸른 잔디밭이 주는 시각적 효과는 아주 크지요.

 


여기서 잔디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은 지난달에 중국 북경 갔을 때 기억이 나서 적어 봅니다.

 

북경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공항을 벗어 나자 마자 시내에 도로 가에서 조경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도로 청소를 하기도 하고 가로수들을 정리를 하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12월 중순경이라 북경에는 이미 겨울이더군요. 바람도 차갑게 불고 영하권의 날씨로 이미 가로수나 도로 조경수들이 푸른빛을 잃고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로 중간의 화단에 심어져 있는 잔디는 새파랗게 싱싱하게 살아 있더군요.

잔디가 추위에도 잘 견디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차창밖을 물끄러미 내다 보고 있는데 일하시는 분 중에 한 분이 열심히 살충제를 뿌리고 계시더군요.

등에 짊어진 분무기 잘 아시지요. 한 손으로 펌프질 하면 살충제가 뿜어져 나오는 것 말입니다.

 

역시 중국의 수도 북경 답게 도로 화단에 잔디를 잘 가꾸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분무기로 작업을 하시던 분 바로 뒤쪽 화단의 잔디는 노랗게 말라 있더군요.  아니 같은 화단의 잔디인데 한쪽은 새파랗고 바로 옆은 노랗게 말라 있고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살충제의 효과 때문인가 아니면 물을 자주 안 주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그렇지 바로 한 화단의 잔디 색깔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걸까 ? 하는 의아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무기를 짊어지고 살충제를 뿌리시고 계시던 아저씨가좌우로 팔을 움직여 분사를 할 때마다 잔디가 새파랗게 변신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참 마술을 하시는 아저씨였습니다. ㅎㅎ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바라 보았더니 세상에 노랗게 말라버린 잔디 위에 다가 초록색 페인트를 분사하는 것 이었습니다.

 

무슨 행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잔디를 초록색 물감으로 그것도 도로 중간과 공항 진입로등 그 넓은 지역을 다 초록 페인트로 칠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잔디는 초록색으로 칠하고 중간중간의 나무들은 어떻게 할려는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버스에서 내려 물어 볼 수도 없고 말이지요.ㅎㅎ

 

물감칠을 당한 잔디가 내년 봄에는 제대로 광합성을 해서 원래의 초록을 되찾을 수 가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전시행정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괜히 쓸데 없는 세금 낭비하는 짓이지요.

 

뉴스에서 잔디 소식을 듣고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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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포스팅에 이어서 2 부를 진행합니다.

최종 오더를 수주 계약을 하고 나서  한시라도 빨리 앙골라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 때 프랑스 회사 부사장이 현지를 지원차 방문을 하고 있었니다. 이 회사의 앙골라의 원유 시추와 다이아몬드 광산채굴 사업을 관장하는 부사장이었습니다. 전직 대사 출신으로 불어,아랍어,영어,포루투갈어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저에게 출국을 하지 말라고 하는것입니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에 당장 있는 가장 빠른 비행편으로 출국 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부사장께서 항공편은 자기가 다시 조정해서 조속히 출국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협조를 하나 더 해달라고 하더군요.

현지 조달청장이 장군인데 이 사람 내외를 데리고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로비 여행인데 이때 제가 함께 동행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계약건도 다시 한번 신속한 진행을 부탁도 해야 하고 하니 내가 꼭 동행을 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 3일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참 난감하더군요. 한시라도 빠져 나가고 싶은데 며칠을 더 있어야 한다니..... 그래서 어차피 우리 계약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함께 동행 하기로 하였습니다.

상투메 프린시페


상투메 프린시페 는 아프리카의 섬나라이며 수도는 상투메 에 있는 상투메(문화어: 산토메)이다.

1471 포르투갈인이 발견하기까지는 무인도였으며, 1483부터 포르투갈 본국으로부터의 유형수와 노예로서의 아프리카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는 서인도 제도에 앞서서 사탕수수플랜테이션 농업이 시도되어 16세기 전반까지 이 섬의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중심은 서인도 제도로 옮겨졌으며, 그 대신 이 섬은 앙골라로부터의 노예 무역의 중계 기지가 되었다.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폐지되면서 카카오커피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어 현재 이 나라의 주산업이 되었다. 1885 베를린 회의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승인되었으며, 1951 포르투갈의 해외주가 되었다.. 1974 4 민주화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포르투갈 새 정권은 상투메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 같은 해 11 독립 협정에 조인했으며, 1975 7월 12 정식으로 독립을 한 후에도 1979까지 빈번하게 쿠데타 미수사건이 잇따랐고, 1981에는 식량 부족으로 폭동이 발생하였다.

적도 근방의 대서양과 만나며 가봉의 북서쪽 해안에서 3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기도 하다. 두 섬으로 이뤄진 상투메 프린시페는 카메룬 화산지대의 일부이기도 하다.적도가 남쪽 바로 아래를 지나가기도 한다.
열대 기후로서 덥고 습한데 일년 내내 기온이 27 °C 정도이다. 기온은 거의 32도를 넘지 않는다. 밤에는 대개 기온이 낮아서 서늘하다. 평균 강수량은 지역 차가 좀 나는 편이지만 거의 안 내린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기는 10월에서 5월이다. 이 나라는 1975북한과 단독수교하여 왔으나 1988년에는 대한민국과도 공식수교하였다. 주가봉대사관이 공관을 겸임한다

 

다음날 공항으로 함께 데리고 가더니 8인승 자가용 비행기를 타라고 하더군요.

이 회사 부사장 전용 자가용 비행기 입니다. 생전 처음 자가용 비행기를 타 보았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잠시 후에 기장이 저를 부르더니 조종석으로 들어 오라고 하더군요.

조종석에서 내려다보니 바다 위의 섬들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이 하늘빛과 어울려져서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확트인 시야에 보이는 것이 그간 답답하고 움츠러들었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더군요.

루완다를 출발해서 50여분을 북쪽으로 비행하니 적도상에 위치한 상투메 라는 작은 섬나라에 도착 했습니다. 기장이 패스포트를 걷어가더니 알아서 간단히 입국 수속을 밟는 동안 우리는 바로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이 나라에 대한 비자도 없었는데 어떻게 입국 수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공항 계기장에는 최고급 메르세데스가 두대 대기 하고 있어서 바로 비행기 트랩을 내려 차에 탑승 했습니다.

 

30여분을 달려 가자 이 회사 부사장 개인별장이라고 하는데 50여개의 방갈로가 각각 독립되어 잘 가꾸어진 조경과 어울려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져 있더군요.

 뒤쪽으로 울창한 적도의 산림이 우거져 있고 앞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대서양의 바다가 바로 보이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위치 해 있습니다.

 사진위에 하얗게 그어진 선이 적도 회귀선입니다.   이 적도 회귀선 을 좌우로 한발씩 올려 놓고 사진들을 많이 찍지요. 적도회귀선을 가랑이 사이에 두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잊지못할 기억입니다.

적도의 날씨는 아주 후덥지근하고 덥습니다.

한 낮에는 가슴이 컥 하고 막힐 정도의 기후입니다.

키를 각각 하나씩 주면서 방갈로를 지정해 줍니다. 방갈로 안은 아주 정갈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고급호텔 수준입니다. 에어컨이 가동되어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로 날씨가 후덥지근합니다.

잠시 땀을 고르고 휴식을 취한 다음 각자에게 정글용 랜드로버 차량 한대씩 제공을 해주더군요.

섬 이곳 저곳을 둘러 보라는 것입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였으나 창문이 없는 오픈형 랜드로버를 타고 섬안쪽 해변부터 시작해서 섬의 정상까지 구비 구비 산길을 타고 돌아 올라 가니 정상에서 보는 파노라마 절경이란 참 감탄 스럽더군요.

섬 전체가 커피나무 천지 입니다.

저도 이때 커피나무를 처음 보았습니다. 지천으로 깔린게 커피 나무 더군요.

이곳에서 커피를 수확해서 유럽으로 많이 수출 한다고 하더군요..

 내려 오는 길에 커다란 폭포수가 있어 시원한 물줄기를 보면서 더위를 잠시 식혔습니다.

폭포수 앞에는 작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의 유래가 재미 있습니다.

 어느 등산가가 이 폭포수 앞을 지나다가 한참을 물줄기를 보고 서 있더라고 하네요.

그래서 옆에 동료가 왜 안가고 그렇게 오랫동안 폭포를 쳐다보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등산객 왈, 떨어지는 폭포물이 언제 다 끝나는 지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네요. ㅎㅎ

그 등산객 영원히 서서 폭포수 물이 다 없어질 때 까지 기달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 가서 폭포수 구경하다가 망부석 되는 일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ㅎㅎ 

열대 야자수 너머로 적도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오늘도 휴식을 취하러 갑니다. 

다음날은 바다 구경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울창한 열대 나무들로 둘러싸인 해변은 참 깨끗하면서도 조용합니다.
수중 탐방도 빼놓을수 없는 구경거리입니다.
다이빙장비를 간단히 챙겨 입고 해변 근처 바닷속을 둘러 봅니다. 유유히 열대어들이 놀라지도 않고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습니다. 

로비 여행이란게 참 간단히 개인적인 여행과 휴식 차원이 아니더군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간 장군의 취향에 맞게 함께 움직이고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여러가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은 더 이상 언급을 하지는 못합니다만 상상에 맡기겠습니다.ㅎㅎ

이렇게 23일간의 짧은 로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루완다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파리행 비행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주 만에 이 전쟁지역을 탈출 할 수 있게 되었 습니다.

그래도 이곳 까지 어렵게 왔는데 그냥 가면 되느냐고 장군께서 일부러 차를 내어 주시던군요.

시장을 한번 들어 보고 필요한 것 있으면 선물로 가져 가라고 하시더군요.

 

시장에는 두명의 중무장한 보디가드를 달고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만 별다른 특산물은 없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아주 상황이 열악하던 시기라 관광객들도 많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념으로 현지에서 목공예품 하나를 골랐더니 선물로  주더군요. 아직까지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남녀 한 쌍이 손을 마주 잡고 만세를 부르는 것 같은 형상입니다. 앞으로 국가의 내정이 안정화 되어서 이 목공예품 처럼 모두가 손을 맞잡고 한 마음으로 분쟁과 파괴가 없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주일 일정으로 들어 왔다가 전혀 통신도 잘 안되는 지역에서 2주 동안 묶여 있어서 여러가지로 참 불안스러웠습니다만 그래도 일단 파리 행 비행기에 몸을 싣자 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나오면서 다시는 위험지역,분쟁지역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수 만번도 더 했습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불안과 두려움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정말 너무도 위험하고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련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참 열심히 내 젊음 하나 믿고 일에 몰두 했던 때라 후회는 없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무모하기도 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많이 발전하고 또한 치안 역시 좀 더 좋아 진것 같습니다.
2010년 아프리카 대륙 컵 대회(축구대회)를 앙골라에서 개최 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부딪혀 볼 목표가 있었을까요?, 그게 직장일이던 개인적인 일이던, 혹은 사랑이던
 말입니다. 새해에는 좋은 목표들 하나씩 챙겨서 집중해보시는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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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옛날 추억을 한번 유추 해 볼려고 합니다.

90년대 초반 이야기 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종합상사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입사 한 부서가 무역부 수출1, 그야말로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의 최 일선 현장을 담당하는 부서였습니다. 당시 저에게 할당된 지역이 중동 아프리카였습니다.

 

당시만해도 중동,아프리카 지역국가들이 아직 우리 나라와 수교가 안된 곳도 많을 정도로  아주 열악한 지역이었지요. 물론 인터넷도 안되던 시대입니다.ㅎㅎ

텔렉스와, 전화, 팩스로 모든 통신을 주고 받던 시기였습니다.

매일 매일 무역의 최 일선에서 밤낮없이 정말 정신 없이 열심히 일을 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을 한다고 회사에서 따로 야근 수당 더 주고,고과 평점을 매기고 실적기준으로 보너스를 따로 주던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고급 노동력 착취를 당했던 것 같습니다.ㅎㅎ

  
여러분,아프리카 앙골라 라는 국가 아시지요.

그당시 우리나라와 수교도 되지 않은 상태의 먼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 였습니다. 북한과는 76 4월 부터 정식 수교가 되어 있었습니다90년대 역시 한창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심할 때 였습니다.

당시 앙골라 정부에서 진행하는 정부 입찰 오더를 처음부터 맡아서 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군쪽에 들어가는 군장비에 관한 비즈니스 였습니다. 앙골라 정부에서 결재대금으로 원유를 주겠다고 해서 회사 차원에서 물물교환을 할 수가 없는 관계로 프랑스에 있는 한 회사와 조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회사에서 앙골라 원유를 가져가고 대신 한국에는 프랑스 회사가 신용장으로 대금 결재를 하는 시스템으로 업무 정리가 일단 되었습니다.

      앙골라 중앙은행(포루투갈 풍의 건물이 웅장해 보입니다.)

 

최종 오더 수주를 위해 앙골라 현지로 오라는 앙골라 정부쪽의 요청이 떨어 졌습니다.

한창 내전이 일어나서 정정이 불안한 곳인데 직접 들어가서 최종 오더 수주를 결정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들어갈 엄두를 못 내었을 텐데 당시는 젊은 혈기에 아무 주저 없이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도 전혀 말리지를 않더군요. ㅎㅎ   먼저 비자를 받기 위해 황열병 백신 주사를 접종을 한 다음에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미수교 국가라 대사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지 정부에 문의를 하였더니 국내 한 원양어선 회사를 소개 시켜 주더군요. (I 회사). 이 회사가 앙골라 현지에서 원양 어선단을 관리를 하기 위해 직원이 나가 있어서 현지에 지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회사를 통해서 비자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암튼 우여곡절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출장예정 기간은 일주일.

김포출발-파리경유-루완다(앙골라 수도)로 가는 긴 여정이 었습니다.

2008년도의 르완다 모습

 

루완다

앙골라의 수도이며 국내 최대의 도시이자 2번째로 번화한 항구이다. 1576년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가 세운 뒤 1627년 식민지의 행정중심지가 되었고, 당시 브라질로 노예를 보내는 주요수출항이었다.  주요수출품은 원유,커피·목화·다이아몬드·철·소금 등이다.

지금은 초고층 빌딩들과 넓은 대로가 한층 현대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만 20여전만해도

내전으로 신음하던 병든 도시였습니다.

 

포르투갈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무장 저항운동이 1930년까지 계속되었다. 포르투갈 통치기간 동안에는 사실상 토착민을 위한 경제 개발의 기회가 매우 적었으며, 20세기까지도 강제노동이 지속되었고 모든 투자는 포르투갈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1950년대 들어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MPLA의 지지기반은 음분두족이었으며, 이 정당이 앙골라 독립투쟁의 주요세력으로 활동했다. 그외에도 종족이나 종교·이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독립투쟁은 196070년대에 절정에 달해 1975년 마침내 포르투갈군이 앙골라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이어 각 분파간의 싸움이 내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련과 쿠바의 도움을 받아 MPLA가 앙골라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서방국가가 지원하고 오빔분두족이 주축이 된 게릴라 조직 UNITA와의 산발적인 전투가 지속되었다. 나미비아의 지위에 관한 협정에 의해 1989년 쿠바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내전이 장기적으로 지속 되던 때 전쟁터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르완다 공항에 도착 해서 수화물을 찾아서 나가는데 세관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간 수화물이 온통 군대물품으로 가득찬 더블백 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관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검사를 하게 된 것 이지요.

따로 공항 한쪽에 있는 외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하나 하나 일일이 물건을 꺼내어서 펼쳐 놓더니 완전히 심문하는 분위기로 돌변하더군요. 

물건의 내용이 민감한 것들이라 공항에서 여기 저기다가 전화를 하고 난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거의 3시간을 붙잡혀 있었습니다. 불안 해지더군요.

이 친구들이 심문하는데  정부군쪽인지 반군쪽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물어보는데 대답하기가 참 망설여지더군요.

암튼 한참 열심히 설명을 하고 현지 협상 파트너 실무자 대령 Q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도 도통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대령이 한 사람 들어 오더군요. 물론 저도 얼굴을 모르지요. 들어오자 마다 저를 심문하고 있던 세관직원을 군화발로 사정없이 조인트를 까는 것입니다.

막 뭐라고 한창 난리를 치고 조인트를 까고 완전히 초죽음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저보고 함께 나가자는 것입니다. Q대령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왔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 아까 세관원을 왜 쪼인트를 까버렸냐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가 연락을 받고 바로 풀어 주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공항까지 나온거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호텔로 가는 30여분 동안 도로 곳곳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검문을 철저히 하고 있더군요. 분위기가 참 살벌했습니다.

야 이것 잘못 온 것 같다라는 생각에 불안감이 서서히 밀려 오더군요.

 

Q대령은 저를 호텔에 남겨 두고는 피곤 할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오전에 상담을 위해 픽업을 하러 오겠다고 하더군요암튼 내일 상담을 마치면 모레는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먼저 회사에 도착 사실을 보고해야 하는데 전화 사정이 문제였습니다.

호텔 로비에 전화가 한대 있는데 먼저 국제 전화를 신청해서 한시간정도 기달려서 받는 전화 였습니다.

먼저 국제 전화를 신청해두고 호텔 로비에서 기달리고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는 외국인 두명이  있더군요. 물어 보니 프랑스 기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곳 치안 상황에 대해 몇가지 물어 보았습니다.

기자들 하시는 말씀이 절대로 혼자서는 호텔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시내에 나가면 외국인들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군요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로비가 일주일전에 반군의 공격을 받아 총격으로 여러 사람이 다쳤다고 하더군요.   아이쿠 큰일 났구나 싶더군요. 괜히 왔구나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신청한 전화는 연결이 안되고 치안 상황은  않좋고 참 난감했습니다. 꼼짝없이 호텔에서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일 신속히 상담끝내고 돌아가야 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다음날, 약속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Q대령은 오지를 않습니다.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이것 참 힘든 동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제 전화는 연결이 잘 안되고 참 여러가지로 난감하더군요.

그냥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 갈수 도 없는 것 아니냐 하는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일단 왔으니 한번 부딪혀 보고 라도 가야 지 하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오후가 되자 Q 대령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전황이 심각해서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호텔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내로 돌아 와서 상담 마무리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으니 그냥 귀국 하겠다고 했더니 안된 다고 하면서 꼭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이틀만 더 기달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Tv에 나오는 현지 방송 뉴스들 보니 주변 마을에서 반군들에게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사진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정부 방송이어서 그런지 민간인 피해를 집중적으로 내 보내주는 것 같습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연속이 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Q대령이 밤에 찿아 와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선에서 바로 달려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더군요.

함께 차를 타고 나가서 해변근처의 한 식당으로 갔습니다.

차가 주차장에 서자 차 밖으로 나가니 Q대령이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 드는게 아니겠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헉 설마 ,,,,,,,  머나먼 아프리카,아무도 모르는 앙골라,루완다 해변에서 무슨일이 일어 나지 싶었습니다Q대령이 저한테 다가오는게 아닙니까, 그러고는 어두운 해변가 쪽으로 가더니 탄환을 모두 빼내어 버리는게 아니겠습니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리고는 물어 보았습니다. 왜 탄환을 모두 제거 하느냐고,,,?  그랬더니 저녁 먹으면서 술 한잔 하게 되는데 혹시 총기 사고가 날지 몰라서 그런다고 하면서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암튼 참 어려운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현재 전선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그래서 후방에서 상담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치,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체류 하고 있을 수 가 없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 모든 상담 마무리를 하기로 하고 다음날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상담을 시작하여 밤 늦게까지 기나긴 협상을  모두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정말 목숨 걸고 수주한 오더 였습니다.

 
여기까지 1부 마무리하고 2부는 다음 포스팅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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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수십번도 더 와본 항주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곳을 보고 나서『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경탄할 정도로 항주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중국 사람들은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이라는 말로 그 아름다움을 극찬했으며, 어떤 시인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 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항주는 4천 년 전부터 고대문화가 일어났으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南宋)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으로, 수나라 때 비로소 항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네요.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

同舟)라는  고사도 오()나라와 월()나라가 이 지역에서 흥망성쇠를 하고 있을 때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역사적인 사실들을 좀 공부하고 어느 지역을 방문하면 좀 더 흥미롭고  의미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주에 서호가 없었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서호는 항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볼 만한 곳입니다. 항주를 관광하러 온 사람 중에 명성에 비해 별로 볼 것이 없어 다소 실망하더라도 서호만큼은 그 아름다움에 취할 것이다고 하네요.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으로, 면적 5.6, 둘레 15㎞의 타원형 호수로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중국의 호수치고는 별로 크지는 않지만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서 절색의 구릉과 계절을 장식하는 나무, 아침과 저녁으로 비오는 날과 개인 날, 그리고 춘하추동 각각 나름대로의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호수의 풍경을 빼고도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등이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지요

.

봄에는 이세상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 주위는 마치 꽃으로 싸안은 것처럼 보이고  여름이 되면 모란, 석남화(石楠花), 만수국(萬壽菊), 백일초(百日草)와 더불어 호면을 덮는 백련(白蓮), 홍련(紅蓮)이 만개합니다. 가을은 가을대로 물푸레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호면에 흐르고 난과 국화의 큰 송이꽃이 피며 백설이 내리는 겨울에도 꽃은 끊이지 않아 청초한 동백꽃과 일찍 피는 매화가 봄이 곧 찾아올 것을 알린다고 합니다.

 

서호는 많은 문인 객(文人墨客)들이 사랑한 곳으로 특히 백낙천,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입니다. 특히 송나라 때의 시인 서동파는 서호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서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다.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가 항주의 미인이라는 데서 서호를 서시에 비긴 것이다라고 합니다.

서호는 호수면을 가르는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라는 두제방으로 나뉘어져 외호(外湖), 내서호(內西湖), 악호(岳湖), 서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세분되는데 한결같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중국인들은 서호의 아름다움을 10가지 절경으로 꼽았는데, 겨울에 눈이 녹으면서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교잔설(斷橋殘雪), 백제 서쪽끝에 호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인 평호추월(平湖秋月), 서북쪽 비정( )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호수에 연꽃 향기 그윽한 곳인 곡원풍하(曲院風荷),

시인 소동파가 만든 제방인 소제춘효(蘇堤春曉), 5백여 그루의 모란뿐 아니라 2백 종 1 5천 그루의 꽃에 둘러싸여 홍어지(紅魚池)에서 노는 분홍빛 잉어를 바라 는 즐거움에 연유해 붙어진 화항관어(花港觀魚),

서호의 동남쪽에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가 고운 곳인 유랑문앵(柳浪聞鶯), 호수 서남쪽에 있는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에 있는 북고봉(北高峰)이 산수화처럼 운치가 있는 쌍봉운( 峰雲),

서호 안에 만든 인공섬으로 이 섬 남쪽에 있는 높이 2m의 석탑에 난 구멍으로 바라보는 달이 아름다운 삼담인월(三潭印月), 지금은 종이 없어서 들을 수 없지만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운치를 돋구는 남병 종(南屛晩鐘), 뇌봉산(雷峰山) 꼭대기에 있던 뇌봉탑(雷峰塔)에서 비치는 석양이 분위기가 있는 뇌봉석조(雷峰夕照) 등이다

 

다음 날, 몇가지 업무 정리를 하고 은행쪽에 필요한 서류를 위해 상해를 다녀와야 합니다. 상해 총영사관에 서류를 하나 인증 받으러 같다 와야 합니다.

상해 총영사관 홈페이지에 접속을 해보니 실시간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인터넷 서비스를 하고 있네요. 바로 접속해서 몇 가지 문의를 하니 실시간으로 답변을 해주시네요.

참 편리하고 좋은 시스템을 운영을 하고 계시더군요.

해외에 나와 우리나라 공관의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인터넷으로 받아보기는 상해 총영사관이 처음입니다. 이런 서비스가 전세계 공관에 다 시행이 되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입니다.아침 일찍 출발 (8:30)

시내는 출근 시간이라 차량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보슬비가 간간히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내려서인지 하늘도 잔뜩 찌뿌려져 있습니다.

항주-상해 고속도로 입니다. 간간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약간 끼었네요.

 

3시간여를 달려 상해시내를 들어서니 역시 항주 보다 차가 더 밀리네요.

GPS를 달고 오는 덕에 쉽게 시내에서도 길을 찾을수 있습니다.
일본 영사관이 나오고 그 바로 근처에 한국 총영사관이 있네요.


대한민국 상해 총 영사관, 정문 앞에서 사진을 하나 찍을걸 깜박 했습니다.
그래서 사진 하나 빌려 왔습니다.

정문에서 신분증 보여주고 입구를 들어섭니다.

정문 입구문이 한 사람만 들어가게끔 쇠창살로 막아서 회전하면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밀고 들어가는데 뒷발이 걸리적 거립니다. 보완을 위해서 그런것 같기는 한데 너무 비좁습니다. 암튼 들어가서 서류인증 받는데 30여분, 영사관에는 여러분들이 많이 와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기 번호표 121, 5분이 나 보다 더 먼저 계셔서 기다립니다.

입구에 두분의 이모님들이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문의 하면 잘 답변을 해주시네요.

직원 분 이신지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암튼 아주 친절하고 자세히 안내를 잘 해주십니다.

제 차례가 왔습니다. 바로 서류 접수하고 수입인지 사서 붙이고 인증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사님 성함이 S영사님, 바로 3개월 전에는 모로코 대사관에 계셨는데  상해 총영사로 나오신 모양입니다. 이름만 보아도 반갑네요. 바쁘실 것 같아서 직원 분에게 인사 대신 전해드리라고 이야기 하고 나왔습니다.

바로 항주로 돌아 옵니다. 돌아 오는 길에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이 아주 혼잡하고  막힙니다.  대형트럭들이 특히 많이 보입니다.

물류가 움직인다는 것은 시장이 잘 돌아 간다는 것이지요. 전세계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치 않고 침체되어가고 있는데 중국은 예외인 것 같습니다. 중국의 힘이 느껴집니다.

 

한 시간 반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몇가지 메뉴를 시켜서 식판에 담고 나오면 대금을 지불하는 시스템이네요.

한참을 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변에 있는 커다란 통에서 밥을 자꾸 사람들이 퍼가네요.

밥공기는 아마도 먹고 또 먹고 리필이 가능합니다. 밥 인심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바깥에는 비가 부슬부슬 계속 내리네요.

다시 차를 달려서 항주에 도착합니다. 필요한 서류를 은행에 제출하고 호텔에 들어오니 오후 4가 넘어 갑니다.

간단히 업무를 정리하고 거래선과 저녁 약속을 위해 나갑니다,. 19:00

저녁 테이블에 온주,닝보 에서 3 회사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항주에 있는 무역 회사와 일을 하는 하청 업체들입니다.

크리마스 트리가 장식이 되어 있어 밤에는 분위기가 한껏 고조됩니다.

루돌프와 산타가 벌써 오셨네요.

다같이 식사를 하고 오늘은 발맛사지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발맛사지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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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자장에서 항주로

호텔서 택시를 타고 시자장 공항 까지는 50분 정도 소요 됩니다.

공항으로 가는 방법은 공항 리무진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체류 했던 호텔에서는 공항 버스가 오지를 않고 택시를 타고 10여분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번거로워서 택시를 타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차창 밖으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뿌였습니다. 3일 체류 내내 제대로 햇빛 구경을 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기 오염이 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자장성 성장이 부임을 해와서 도시 거리 정비 사업이 여러 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 조금은 개발을 늦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내 음식점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역시 인터넷은 중국통신사에 서비스 가입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네요

보안 검사를 한 후 공항 대기실로 들어갑니다.

20:20분 출발, 샤먼행 비행기 인데 중간에 항주를 들렀다가 가는 비행기 입니다.

공항 대기실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아마 회사에서 단체로 출장을 가는 것인지 여행을 가는 것인지 그룹인 것 같습니다.

국내선 공항이라 그리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공항 같습니다.

 

공항 내부 벽면에 길다란 산수화 그림이 걸려 있네요. 족히 30m는 되어 보이는 길이입니다.

 면세점은  중국 답게 붉은색으로 진열되고 포장된 상품들이 많습니다.

역시나 비행기 연착, 30분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샤먼서 출발-항주 경유 해서 시자장으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30분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 비행기가 바로 우리를 싣고 항주 경유 샤먼으로 가는 것입니다.

20:50, 드디어 출발. 빗줄기가 간간히 뿌리는 쌀쌀한 날씨입니다.

두시간정도 소요되는 비행 시간 입니다.

 

간단히 기내식이 나옵니다.

빵 한조각에 케익 한조각,오렌지 하나, 콩나물 조림 5가닥이 메뉴 입니다.

콩나무 조림 5가닥은 왜 메뉴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그래도 입맛은 없지만 억지로 먹어둬야 합니다.

그래도 따끈한 차 한잔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여기 저기서 기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도 군대 내에서 단체로 신종 플루가 걸렸다는 뉴스가 있어서 중국 당국이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기침을 해대면 괜스레 불안감이 밀려 옵니다. 그래도 어떻하나요. 하는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럴려니 하고 넘어가야지요.

 

항주 도착하여 기내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는 공항 통로입니다.
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한산합니다.


22:30
, 드디어 항주 도착, 바깥은 캄캄 합니다.

가방찾아 나가니 23:00 , 마중 나오기로 한 기사 아저씨가 많이 기달렸을 둣 합니다.

날씨는 시자장보다는 덜 싸늘합니다. 남쪽이라 그런지 기온이 그리 내려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 밤중인데도 몸이 움츠려 드는듯한 추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호텔에 도착 하니 23:50.


호텔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호텔 입구에도 네온 싸인이 장식이 되어 있네요.

이곳은 그래도 벌써 크리마스 분위기가 여러곳에서 감지되네요.
트리와 장식,네온 싸인 들이 반짝거리고 캐롤송도 들립니다.

호텔방에 들어오니 24:00

오늘도 이렇게 긴 하루가 마감됩니다. 간간히 비가 내리는 걸로 보아 내일은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연일 밤 늦게까지 계속 되는 강행군에다  날씨가 꾸물 꾸물하여 온몸이 아주 지쳐 녹아 내리는것 같습니다.  내일 업무 준비를 간단히 하고 취침 합니다.
see you tomorr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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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거래선 회사를 방문하여 상담을 마치고 나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식당에서 거래선 회사 직원이 시켜서 먹은 자장면입니다.

한국처럼 짜장을 사용하는게 아니고 육수 국물을 넣어서 말아 먹는 스타일입니다.
한국 자장면 생각이 나서 찍어 보았습니다.

시자장(shijazhuang-石家庄 석가장) 은
하북성 성도로써 북경에서 남쪽으로 대략 250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으며 명대에는 원래 노루를 잡는 현의 한 촌락에 불과했는데 1902년 철자의 대규모 건설에 따라 점차 도시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1925년 휴문진과 합해 석문시가 되었고 1948년 석가장시로 이름을 정햇다고 합니다.

 

하북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나  다른 성에 비해 대외개방이 다소 늦게 시작되었지만 북방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외국인 투자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으며 철도가 날라온 도시라고 부를 정도로 철도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석가장시는 관광자원으로는  서백파 중공중앙의 옛터와 안제교 융흥사 등 9곳이 이미 국가급 문화재 보호기관에 속하여 있다고 하네요. 창암산, 장석암은 국가 중요 풍치구역이고 또한 성급 중요 보호문화재와 풍치구역이 75개 곳에 다다를 정도로  석가장시의 관광업은 잠재력이 크다고 합니다.

 

베이징-홍콩을 이어주는 징지우철도가 스자좡을 경유하고 있으므로 교통이 편하여 경제무역교류에 용이하고  특히 국가 급 개발구인스쟈좡 고신기술 산업기발구는 중국에서 가장 일찍 선정된 27개 첨단기술 산업개발구역 중 한곳으로서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에 특혜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친황다오 항구를 경유한 중개무역 및 면세수출입이 가능하여 국내 및 외국 투자자들의 큰 중시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석가장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석가장은 일제하 당시에는 무려 3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는 도시입니다.

중일전쟁 이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화북지방으로 이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수가 대단히 많아져서 1940년 무렵에 북경과 천진에는 10만여명, 석가장에는 3만여명, 신향에는 8000여명, 태원에는 5000여명, 청도와 제남에는 각각 1만여명의 있어 화북의 한국인 동포들만 해도 무려 20만에 달하였다고 합니다.(항일무장독립투쟁사,511).

 

위키 백과에 다르면 관색(關索) 또는 관삭은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로, 관우의 셋째 아들로 나온다. 형주에서 관우와 함께 분전하다가 관우가 생포되자, 석가장으로 피하였다. 제갈량남만 정벌에 따라 나섰고, 이후 북벌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국지연의를 몇 번 읽은 사람들이라면 관우와 장비보다도 조운을 더 좋아 하기도 하지요.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관우와 장비의 활약 이   더   용감무쌍 했지요. 또한 조운은 마초, 황충, 위연에게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째서 그를 더 좋아할까? 그것은 조운이 진솔하기 때문일 터이다.
조운의 자는 자룡(子龍)이다. 상산(常山) 진정현(眞定縣) 출신으로 현재의 하북(河北)성 석가장(石家庄) 근처의 정정(正定)사람이다. 180㎝가 넘는 훤칠한 키에 무인으로서의 웅장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도 올바르고 행동도 단정했다

밤에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주변을 나가보았습니다.

주변에는 호수 공원이 있고 마오쩌둥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마오쩌뚱이 국민당에 밀려 숨어서 3대 전략을 가다듬은 곳이 시자장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전열을 가담은 마오쩌뚱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과 다시 싸움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동상을 세워 두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들이 주말의 밤을 공원에서 즐기고 있는게 참 발랄해보였다. 마오쩌뚱도 이 아이들에게 역사를 이끌었던 위대한 위인으로 기억이 되고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근래 보기드문 폭설이 내려 7cm이상의 적설량을 보여 시내 주요 도로가 큰 혼잡을 빚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햇볓이 들지 않는 음지쪽으로는 아직도 녹지 않은 잔설의 흔적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추운 날씨임에도 주말의 저녁 시간대라 많은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이고 있더군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고 있는 양쪽 귓볼을 사정없이 잡아 댕기는 것 같았습니다, 영하 10도 정도의 체감 온도로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하더군요.

근처에 대장금이라는 한국 식당이 있어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시내의 한 쇼핑몰의 2층인데 주변에 한글 간판으로 된 가게들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한글 간판과 중국어 간판이 동시에 걸려 있는 가게 들이었습니다. 이곳도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것 같더군요. 대장금 식당은 북경에 본점이 있고 여러곳에 지점을 운영한다고 한다.

문화의 힘이라는게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히 드라마 판권 하나를 파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음식,그리고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파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랫동안 한국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나의 입맛에는 메뉴에 있는 모두가 맛있어 보였습니다.
장어 덮밥과 설렁탕을 시켜서 먹었는데 음식맛은 괜찮았습니다. 

대장금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주변을 들러보면서 사진을 몇장 찍었습니다,추워서 덜덜 떨면서도 블러그에 올리겠다는 일념으로 참고 찍었습니다.ㅎㅎ

시자장의 주말 밤 풍경은 유독 레이저 빔을 많이 쏘고 있더군요, 무슨 행사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건물들에는 네온싸인으로 장식을 해두어 휘황찬란한 야경이 참으로 현란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제가 묵었던 호텔 입니다.

다음날은 비행기편으로 항주로 출발해야 합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빨리 남쪽 지방으로 가야 겠습니다. 
시자장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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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4일 오전 11:50 

비행기에서 내려 여권 심사 하러 가는 베이징 공항 통로입니다.
중국 풍의 대형 벽화가 걸려 있네요.

공항에서 신종플루 때문에 검색을 꼼꼼 하게 하네요.
관련 서류를 아주 세밀하게 작성하라고 합니다. 향후 7일간 여정,연락처를 다 적으라고 되어 있네요.

그리고 패스포트 컨트롤하고 가방 찾아서 나오는 길에 중국 전화카드 하나 샀습니다. 250rmb .. 사진 아저씨는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항청사 나와서 북경 서부역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렸습니다.(12시30)


버스가 한참을 기달려도 안오네요. 한국 공항버스로 착각한 제 실수 입니다.

날씨는 영하 1도 라고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더 춥게 느껴지네요.

드디어 버스가 왔네요, 버스표가 16rmb,  그런데 버스를 출발 시간이 13:00

열차역 까지 가는데 1시간이 더 걸리더군요. 이 버스가 시내에 있는 버스 역이라는 역은 모두 들렀다 가는 것 같습니다. 열차역 근처에 내리는데 종점인 것 같습니다. 종점 도착 시간이 14:10부랴 부랴 철도역 까지 가보니 벌써 14:25

14:45분 열차인데 늦었다고 마감되었다고 안된다고 하네요.

다음 열차가 17:50 , 거래선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려주었더니  16 출발하는 기차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16 출발 표를 끊었습니다. T5, 기차 14, 대기실로 가는 길도 한참이나 걸어서 갑니다.

대기실 가는 길에 북경역 내부 사진 한컷.
기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역시 중국 입니다.

 

대기실에 가니 승무원 복장의 아주머니, 대기실로 못들어 오게 하고 짐 싣어다 주는 포터 아저씨에게 짐을 맏기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옆에는 짐을 따로 모아서 가져다 주는 아저씨들이 대기하고 있네요. 가방 하나 맏기고 따라서 기차 타는 플랫폼까지 갑니다.

기차가 엄청 깁니다. 20개 이상 차량을 매달고 가는 기차입니다.


날씨도 영하1도 이하 라고 하는데 찬바람이 쌩쌩 불어와 체감 온도는 5도이하인 것 같습니다. 너무 쌀쌀합니다.

카사블랑카에는 아침 저녁 날씨 18,한낮은 25도 정도 하는데 갑자기 영하의 기온을 느끼니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습니다.

 

14호 찾아가서 들어가보니 이게 웬일, 완전히 완행 열차입니다.그리고 제가 산 티켓은 자리가 없는 입석표라고 하네요. 날벼락도 유분수,,,, 입석으로 3시간을 서서 가야 하다니하루 종일 비행기 타고 와서 입석으로 3시간을 서서 가야 하다니,,,, 앞이 캄캄 합니다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서서 가기로 했습니다.(분명 기차안에서 승무원에게 말하면 자석 upgrade가 될 것 같은데 말이 안 통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중국 완행열차 내부 컷 하나

오랜만에 기차도 타봅니다. 그런데 기차안의 풍경이 참 다양합니다.

이 기차는 북경 서부역을 출발하여 남경까지 가는 기차입니다.

 저처럼 입석으로 가는 사람들로 통로도 곽 막혀 있습니다.

승무원 아저씨,20대 초반 정도, 아주 성실합니다. 짐칸에 올려져 있는 가방들을 일일이 정돈합니다.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있지만 각을 맞추어 나란하게 정돈을 아주 잘합니다. 키가 닿지 않아 일일이 의자에 올라가서 정돈을 합니다.

 

드디어 출발, 그런데 기차 내에 음료,간식 파는 아가씨,잡지 파는 아가씨,도시락 파는 아가씨, 오징어포 .맥주 파는 아가씨, 과자 파는 아가씨, 참 많이도 다닙니다. 입석으로 가득찬 통로를 왜 그렇게 자주 오가는지 ,,,,,,,,,,

 

기차는 말 그대로 완행 열차입니다. 가다가 중간에 급행열차 지나가면 서서 길을 내주었다가 또 출발합니다.

1시간여를 지나자 저녁을 먹습니다. 컵라면이 가장 인기 있는 메뉴네요. 차량 한쪽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컵라면을 먹습니다. 미리 음식을 챙겨온 가족들도 있습니다.

도시락도 인기 메뉴, 밥 하나와 반찬 하나, 두 개 세트 도시락이 10rmb,  옆에 아저씨는 아주 냄비를 준비해 왔네요. 조그마한 냄비를 꺼내더니 거기에다가 음식을(라면이랑 여러가지) 해서 드시네요.

 

뒤쪽의 의자아가씨는 주변에 서 있는 아가씨들에게 좀 앉아서 가라고 자리를 양보 합니다. 서로 양보하면서 자리를 바꿔주는 훈훈한 인정이 보입니다.

 

앞자리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카드 놀이를 합니다. 기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 신문을 읽는 사람들도 여럿이 눈에 뜨입니다.

 

기차 안은 금연인데 차량 연결통로 쪽에서는 연달아 사람들이 담배를 피웁니다. 아주 불쾌합니다만 어쩔 수가 없군요. 쳐다보면서 인상만 잔뜩 지푸리는 수밖에,,,, 주변의 중국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듯 그냥 앉아 계십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자장 도착, 밤이라 날씨가 아주 춥습니다.

택시를 타고 바로 호텔로 직행합니다.  택시 아저씨,아마 저녁을 드시는 중이신 것 같던데 제가 타자마자 서둘러 음식을 내려두고 운전을 하십니다.

그냥 천천히 다 드시고 가셔도 되는데 미안하다면서 바로 출발을 하십니다.

어디서건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드디어 호텔 도착 (사진 한컷)

체크인하고 시간을 보니 20:00.

 

집에서 출발하여 호텔 체크인하기까지 28시간 걸렸습니다. 아주 긴 하루였습니다.
호텔에서 블로그 접속을 하는데 이날부터 전혀 접속이 안되더군요.

내일의 업무를 위해 일찍 쉬어야 겠습니다.
Posted by casabla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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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일 오늘부터 한달 가량 출장입니다.

그래서 출장 여정에 대해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

먼저 아침에 집에서 출발(08:00)을 해야 하는데 몇 가지 남은 일을 처리 할려다 좀 늦었습니다. 출발 08:40. 부랴부랴 차를 꺼내 공항으로 향합니다.

출근 시간이라 중간에 많이 막히더군요. 큰일 났다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안개가 자욱하게 끼였습니다. 보통 시간 때이면 40분이면 가는 길인데 좀 막히는 것 같더군요.

시내 신호 막히는 곳 지나 고속도로로 접어드니 차가 좀 덜 막힙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140-150km 이상 달렸습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군요. 비행기가 이륙을 할 수 있을려나 하는 우려가 들 정도입니다. 

공항에 도착 09;15, 차를 입구에서 넘겨주고 바로 공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공항건물 입구에서부터 검문이 심합니다.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일반 환송객들은 공항 청사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더군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아마 VIP가 뜨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모여 있는 인파를 헤치고 청사 안으로 진입, 가방 검사대와 경찰의 검문을 거쳐서 아주 빨리 달려 2층 출국장으로 갔습니다.

 

에어 프랑스, 파리행 보딩을 28번에 하는군요.

28번에 가니 보딩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 보딩객인 모양입니다.  09시 30 보딩 완료. 이젠 돠었다. 비행기는 놓치지 않게 되었네.

조금만 서둘러서 예정대로 08 나왔으면 여유롭게 보딩을 했을 텐데 서울서 연락을 받은 일을 협의 하는 바람에 그만 조금 늦어져 버렸습니다.

암튼 안심

출국장으로 들어갑니다. 역시 입구에 경찰이 패스포트와 보딩 패스를 검사합니다. 그곳을 통과하자 세관검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관원 아저씨, 외환소유하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 묻습니다. 노 달러,노 유로, 낫씽,,ㅎㅎ

정말 아무것도 없냐고 세관원아저씨 반문합니다. 낫씽 !!

 

모로코에서 외환을 반출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고 있습니다.

1년에 패스포트 하나가 환전해 나갈 수 있는 금액이 2천 유로가 못됩니다.

그래서 관광으로 들어오시는 분들은 반드시 환전 영수증을 챙겨두었다가 출국시 남은 돈 환전하는데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 같이 현지 거주자들은 이러한 외환규제로 불편한 점이 아주 많습니다.일반 은행 카드도 와환 사용 한도를 받기 위해서는 특별히 외환청에 허가를 받는 특별한 절차를 받아야 합니다.  좀 번거롭지요.

암튼 패스포트 컨트롤 합니다. 창구 아저씨, 놀랍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오우, 한국말 잘하네요,하니까 즐거워 합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출국심사 하면서 한마디 배웠나 봅니다. 그래도 간단하지만 이런 인사 듣는 것, 기분 괜찮습니다.

출국심사 도장 꽝 ! 받아 들고 들어가니 또 검색대, 검색대에 노트북 꺼내서 따로, 자켓 벗어서 따로 넣고 통과대 들어가니 경찰 아저씨 또 검문 합니다.

외환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없다니깐 자꾸 물어 보네요. 명절 잘 쉬었나고 물어보네요. 명절이야 잘 쉬었지요. 양고기도 많이 먹었고,,,,

검색대 들어간 가방 열어 보라고 하시네요. 무슨 검색을 이렇게 자주 하는것인지,,,, 가방 지퍼 다 열어 줍니다. 근데 보지도 않고 도로 닫으라고 하네요. 뭐여 시방,,xx 훈련 시키는 거여 뭐여 지금

암튼 패스하고 게이트 찾아 들어갑니다. 30번 게이트, 모두 모여 앉아 있네요.


그 앞의 면세점 한 컷, 그리고 내부 한 컷 찍어 봅니다.
한산합니다.


모로코 전통 여성의류인 젤라바를 파는 가게가 눈에 뜨이네요.

마네킹이 예쁜 모델처럼 젤라바를 입고 있습니다,.

젤라바는 남자용 여자용의 구분이 있으나 대부분의 스타일은 헐렁한 원피스 에 삼각 모자가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젤라바의 옷의 색상따라 배우자의 유무를 나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삼각형 긴 모자는  핸드폰이나 작은 손지갑등을 넣어 다니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 밖의 풍경도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웬일로 나들이를 했을까요? 여행을 좋아하는 녀석인가 봅니다. 공항에까지는 인가가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디서 온 녀석일까요?

주인을 잃은 고양일까요? 궁금증이 이네요.

 

10:20, 탑승 시작, 내 자리는 06C. 자리에 앉으니 비가 좀 그치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비행기 이륙에는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음료수 한잔 마시고 나니 이륙준비에 들어 갑니다. 10:40분 이륙

에어 프랑스 AF2197 카사블랑카 모함메드 5세 공항 이륙 했습니다.

 

잠시 후에 기장의 안내 방송 멘트,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까지는 3시간소요 될 거라고 하네요.

 

잠시 기다리자 기내식 아침이 나옵니다. 닭고기 찜과 야채,빵이 나왔네요.

입맛이 당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 집어 먹어 봅니다. 오늘은 아주 긴 여정을 해야 하거든요.

 

식사 후에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한잠 토막잠을 자고 일어나니 비행기는 모로코 북부 탄제를 지나 지브로울터 상공을 건너 스페인 영공을 지나 프랑스 영공으로 접어 듭니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였습니다. 잠시 후 하강 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구름 사이로 하강하니  잠시 동안 온통 하얀 구름 속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구름아래로 내려 가니 딱 트인 평야지대가 보입니다. 프랑스 입니다.

 

멀리 에펠탑을 바라보며 점차 하강을 합니다.

간간히 비가 내리네요. 프랑스 현재 기온은 11도라고 합니다.

터미널 2E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시간 현지 시간 13:45 (프랑스는 모로

코 보다 한 시간 빠릅니다)보통 서울로 들어가면 터미널 2F로 셔틀버스를 타고 청사를 바꿉니다만 오늘은 북경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터미널은 그대로 2E( 게이트 38), 출발시간 18:55,  거의 5시간을 공항에서 기달려야 합니다. 터미널 E,게이트38 을 찾아가는데 모노레일 기차를 타게 되어 있네요. 그전에 없었었던 것 같은데 새로 설치 되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2분쯤 가니 터미널 E 입구에 다시 내립니다. 그리고 검색대.

연말이어서 그런지 검색이 아주 강화 된 것 같습니다. 검색대 아저씨, 제 여권 보더니 안녕하세요한국말로 인사를 합니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을 가던지 한국말 인사를 듣는게 어렵지 않게 되었네요.ㅎㅎ

그 아저씨, 내 뒤에 따라오는 청년에게 안녕하세요하네요. 그 청년, 중국 사람인데요하니 바로 니하오나오네요.

 

검색대 줄이 길게 늘어 서 있네요. 이 아저씨 내 앞에 있던 여성 분에게 물어 봅니다. 러시아 ? 여성분 그렇다고 하네요. 공항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얼굴을 보고도 국적을 기가 막히게 구별하는 것 같네요.ㅎㅎ

 

러시아, 데낄라 ? 이 아저씨 또 오버 하네요. 보드카 !! , 보드카, 맞아 !

암튼 재미 있는 아저씨네요.

무뚝뚝하고 인상 쓰고 있는 것 보다 훨씬 좋습니다.

 

검색대 앞에서

앞에 아저씨, 신발까지 다 벗으라고 하네요. 바로 내 앞에 아가씨, 러시아 여성이군요. 역시 부추 벗으라고 하네요. 부츠 벗을려고 제 앞에서  엎드리는 이 아가씨, 주저 않고 벗든지 하시지 그냥 엎드려서 벗네요.(야한 팬티 다 보이네요. 제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습니다.ㅎㅎ

저는 그냥 통과, 검색대 지나 가방,자켓 챙겨 들고 게이트 38로 올라 갑니다.


게이트 38가니 37로 변경 되었다는 싸인이 보이네요.

바로 옆이니 별문제 없을 듯,,,

잠시 면세점을 둘러 봅니다.

파리는 이제 연말 분위기가 나네요. 면세점 앞에 트리가 장식되어 있네요.

그래서 한 컷, 사진 찍는데 중간에 개념 없으신 아저씨,ㅎㅎ

암튼 그대로 찍었습니다.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인터넷을 할까 했는데  역시,프랑스, 인터넷 라인 사용 할려면 카드를 사던가 신용카드로 결재를 하라고 하네요. 굳이 뭐 지금 인터넷 안해도 되니까,,,ㅎㅎ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인천 공항이 얼마나 서비스가 잘되어 있는지 느껴집니다. 노트북,인터넷 라인 그냥 무료로 사용 가능하지요. 참 좋은 공항입니다.ㅎㅎ

 

인터넷 접속은 못하고 공항 안에 앉아서 포스팅 글 작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간 12 3 14:40. 아직도 2시간 더 기달려야 하는군요.

 

공항 밖에 에어 프랑스 대기 하고 있네요. 제가 타고갈 비행기 입니다.
 

이번 여정은 카사블랑카(무함마드5)-파리(샤르르 드골)-베이징(서도우)

베이징에는 내일(4) 아침 1145 도착, 도착 후에 셔틀버스(7) 타고 베이징 서부 기차역 까지 가서 고속철로 2시간 타고 가면 시자장(석가장)이 나옵니다. 석가장 에서 호텔 체크인 하면 이글 포스팅 올릴 수 있겠습니다.

석가장 에서는 2박 할 예정입니다. 5일날 아침, 거래선에서 호텔로 픽업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전 10.

그리고 거래선 회사가 있는 곳(안핑) 까지 승용차로 2시간30분 정도 갑니다.

출장업무 시작입니다. 일이 잘 마무리 되면 6일 아침 일찍 항주로 가는 비행기(국내선)를 타야 합니다.

일단 이곳에서 업무가 끝나면 다시 포스팅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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