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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9 아프리카 앙골라 공항에서 억류된 사연 30

오늘은 옛날 추억을 한번 유추 해 볼려고 합니다.

90년대 초반 이야기 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종합상사에 입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입사 한 부서가 무역부 수출1, 그야말로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의 최 일선 현장을 담당하는 부서였습니다. 당시 저에게 할당된 지역이 중동 아프리카였습니다.

 

당시만해도 중동,아프리카 지역국가들이 아직 우리 나라와 수교가 안된 곳도 많을 정도로  아주 열악한 지역이었지요. 물론 인터넷도 안되던 시대입니다.ㅎㅎ

텔렉스와, 전화, 팩스로 모든 통신을 주고 받던 시기였습니다.

매일 매일 무역의 최 일선에서 밤낮없이 정말 정신 없이 열심히 일을 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을 한다고 회사에서 따로 야근 수당 더 주고,고과 평점을 매기고 실적기준으로 보너스를 따로 주던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고급 노동력 착취를 당했던 것 같습니다.ㅎㅎ

  
여러분,아프리카 앙골라 라는 국가 아시지요.

그당시 우리나라와 수교도 되지 않은 상태의 먼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 였습니다. 북한과는 76 4월 부터 정식 수교가 되어 있었습니다90년대 역시 한창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심할 때 였습니다.

당시 앙골라 정부에서 진행하는 정부 입찰 오더를 처음부터 맡아서 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군쪽에 들어가는 군장비에 관한 비즈니스 였습니다. 앙골라 정부에서 결재대금으로 원유를 주겠다고 해서 회사 차원에서 물물교환을 할 수가 없는 관계로 프랑스에 있는 한 회사와 조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회사에서 앙골라 원유를 가져가고 대신 한국에는 프랑스 회사가 신용장으로 대금 결재를 하는 시스템으로 업무 정리가 일단 되었습니다.

      앙골라 중앙은행(포루투갈 풍의 건물이 웅장해 보입니다.)

 

최종 오더 수주를 위해 앙골라 현지로 오라는 앙골라 정부쪽의 요청이 떨어 졌습니다.

한창 내전이 일어나서 정정이 불안한 곳인데 직접 들어가서 최종 오더 수주를 결정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들어갈 엄두를 못 내었을 텐데 당시는 젊은 혈기에 아무 주저 없이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도 전혀 말리지를 않더군요. ㅎㅎ   먼저 비자를 받기 위해 황열병 백신 주사를 접종을 한 다음에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미수교 국가라 대사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지 정부에 문의를 하였더니 국내 한 원양어선 회사를 소개 시켜 주더군요. (I 회사). 이 회사가 앙골라 현지에서 원양 어선단을 관리를 하기 위해 직원이 나가 있어서 현지에 지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회사를 통해서 비자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암튼 우여곡절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출장예정 기간은 일주일.

김포출발-파리경유-루완다(앙골라 수도)로 가는 긴 여정이 었습니다.

2008년도의 르완다 모습

 

루완다

앙골라의 수도이며 국내 최대의 도시이자 2번째로 번화한 항구이다. 1576년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가 세운 뒤 1627년 식민지의 행정중심지가 되었고, 당시 브라질로 노예를 보내는 주요수출항이었다.  주요수출품은 원유,커피·목화·다이아몬드·철·소금 등이다.

지금은 초고층 빌딩들과 넓은 대로가 한층 현대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만 20여전만해도

내전으로 신음하던 병든 도시였습니다.

 

포르투갈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무장 저항운동이 1930년까지 계속되었다. 포르투갈 통치기간 동안에는 사실상 토착민을 위한 경제 개발의 기회가 매우 적었으며, 20세기까지도 강제노동이 지속되었고 모든 투자는 포르투갈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1950년대 들어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MPLA의 지지기반은 음분두족이었으며, 이 정당이 앙골라 독립투쟁의 주요세력으로 활동했다. 그외에도 종족이나 종교·이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독립투쟁은 196070년대에 절정에 달해 1975년 마침내 포르투갈군이 앙골라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이어 각 분파간의 싸움이 내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련과 쿠바의 도움을 받아 MPLA가 앙골라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서방국가가 지원하고 오빔분두족이 주축이 된 게릴라 조직 UNITA와의 산발적인 전투가 지속되었다. 나미비아의 지위에 관한 협정에 의해 1989년 쿠바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내전이 장기적으로 지속 되던 때 전쟁터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르완다 공항에 도착 해서 수화물을 찾아서 나가는데 세관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간 수화물이 온통 군대물품으로 가득찬 더블백 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관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검사를 하게 된 것 이지요.

따로 공항 한쪽에 있는 외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하나 하나 일일이 물건을 꺼내어서 펼쳐 놓더니 완전히 심문하는 분위기로 돌변하더군요. 

물건의 내용이 민감한 것들이라 공항에서 여기 저기다가 전화를 하고 난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거의 3시간을 붙잡혀 있었습니다. 불안 해지더군요.

이 친구들이 심문하는데  정부군쪽인지 반군쪽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물어보는데 대답하기가 참 망설여지더군요.

암튼 한참 열심히 설명을 하고 현지 협상 파트너 실무자 대령 Q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도 도통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대령이 한 사람 들어 오더군요. 물론 저도 얼굴을 모르지요. 들어오자 마다 저를 심문하고 있던 세관직원을 군화발로 사정없이 조인트를 까는 것입니다.

막 뭐라고 한창 난리를 치고 조인트를 까고 완전히 초죽음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저보고 함께 나가자는 것입니다. Q대령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왔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 아까 세관원을 왜 쪼인트를 까버렸냐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가 연락을 받고 바로 풀어 주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공항까지 나온거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호텔로 가는 30여분 동안 도로 곳곳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검문을 철저히 하고 있더군요. 분위기가 참 살벌했습니다.

야 이것 잘못 온 것 같다라는 생각에 불안감이 서서히 밀려 오더군요.

 

Q대령은 저를 호텔에 남겨 두고는 피곤 할 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오전에 상담을 위해 픽업을 하러 오겠다고 하더군요암튼 내일 상담을 마치면 모레는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먼저 회사에 도착 사실을 보고해야 하는데 전화 사정이 문제였습니다.

호텔 로비에 전화가 한대 있는데 먼저 국제 전화를 신청해서 한시간정도 기달려서 받는 전화 였습니다.

먼저 국제 전화를 신청해두고 호텔 로비에서 기달리고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는 외국인 두명이  있더군요. 물어 보니 프랑스 기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곳 치안 상황에 대해 몇가지 물어 보았습니다.

기자들 하시는 말씀이 절대로 혼자서는 호텔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시내에 나가면 외국인들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군요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로비가 일주일전에 반군의 공격을 받아 총격으로 여러 사람이 다쳤다고 하더군요.   아이쿠 큰일 났구나 싶더군요. 괜히 왔구나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신청한 전화는 연결이 안되고 치안 상황은  않좋고 참 난감했습니다. 꼼짝없이 호텔에서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일 신속히 상담끝내고 돌아가야 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다음날, 약속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Q대령은 오지를 않습니다.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이것 참 힘든 동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제 전화는 연결이 잘 안되고 참 여러가지로 난감하더군요.

그냥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 갈수 도 없는 것 아니냐 하는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일단 왔으니 한번 부딪혀 보고 라도 가야 지 하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오후가 되자 Q 대령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전황이 심각해서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호텔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내로 돌아 와서 상담 마무리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으니 그냥 귀국 하겠다고 했더니 안된 다고 하면서 꼭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이틀만 더 기달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Tv에 나오는 현지 방송 뉴스들 보니 주변 마을에서 반군들에게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사진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정부 방송이어서 그런지 민간인 피해를 집중적으로 내 보내주는 것 같습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연속이 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Q대령이 밤에 찿아 와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선에서 바로 달려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더군요.

함께 차를 타고 나가서 해변근처의 한 식당으로 갔습니다.

차가 주차장에 서자 차 밖으로 나가니 Q대령이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 드는게 아니겠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헉 설마 ,,,,,,,  머나먼 아프리카,아무도 모르는 앙골라,루완다 해변에서 무슨일이 일어 나지 싶었습니다Q대령이 저한테 다가오는게 아닙니까, 그러고는 어두운 해변가 쪽으로 가더니 탄환을 모두 빼내어 버리는게 아니겠습니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리고는 물어 보았습니다. 왜 탄환을 모두 제거 하느냐고,,,?  그랬더니 저녁 먹으면서 술 한잔 하게 되는데 혹시 총기 사고가 날지 몰라서 그런다고 하면서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암튼 참 어려운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현재 전선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그래서 후방에서 상담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치,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체류 하고 있을 수 가 없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 모든 상담 마무리를 하기로 하고 다음날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상담을 시작하여 밤 늦게까지 기나긴 협상을  모두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정말 목숨 걸고 수주한 오더 였습니다.

 
여기까지 1부 마무리하고 2부는 다음 포스팅에 올립니다.


Posted by casabla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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