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white house) 이 카사블랑카 ?

 

카사블랑카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어 아이디를 카사블랑카로 했고 신제품 올리브 비누도 카사블랑카브랜드로 출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카사블랑카에 살면서 도시 이름을 왜 카사블랑카라고 했을까?
 
의문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 기회에 간단히 카사블랑카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카사블랑카(Casablanca , "하얀집" 아랍어, دارالبيضاء다를베이다, 영어로 white house, 한마디로 백악관이지요)
 
대서양에 위치한 모로코의 최대 도시 입니다.. 위도는 33°32N 7°35W.로 우리나라와 위도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있습니다만 지중해성 기후라 평균 기온이 겨울에는 섭씨 15, 여름에는 섭씨 24도로 1년 내내 쾌적한 기후를 자랑 합니다  때문에 여름이면 이곳의 해안은 북아프리카의 밝은 햇빛과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푸른빛으로 물든 바다와 하늘, 따사로운 햇살을 벗삼아 한가로이 낚시질하는 사람들, 푸른 야자수가 어우러진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휴양객 들로 인산 인해를 이룹니다.


2005 9월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카사블랑카"의 인구는 385만 명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2009년 현재는 500만명이 넘을 걸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그 중에 저희 가족도 인구 센서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ㅎㅎ

해변의 모습

우리나라의 부산처럼 모로코의 주요 항구 도시이며 거의 대부분의 해상운송의 화물들이 카사블랑카 항에서 하역되고 있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상업 도시 입니다. 아프리카 전체 대륙에 있어 6번째로 큰 도시이며(5개 큰 도시는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로코의 비지니스의 핵심 도시이기 때문에 모로코의 경제 수도로서 중앙은행 및 기타 모든 은행의 본점들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립 모로코 해군의 제1해군기지이기도 합니다. 행정 및 정치 수도로는 북쪽으로 90km정도 떨어져 있는 라바트가 국가의 수도입니다.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 있는 세계 유수의 다국적기업들을 유치하고 있고 주요 산업 시설들을 유치하고 있는 손꼽히는 경제 허브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카사블랑카 지역은 적어도 7세기 까지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이  앙파(ANFA HILL)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앙파 지역은 구릉지 형태의 작은 산이라기 보다 언덕 정도 라고 해야 맞을 듯 싶습니다.  이곳이 카사블랑카의 시발점인 곳 이지요. 지금은 고급, 대형 빌라들이 있고 왕궁도 있는 지역입니다.

               멀리 보이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곳이 앙파힐, 오른쪽 너머가 대서양 바다가 보입니다.

 

앙파 언덕을 오르면, 대서양이 펼쳐져 그 아름다움이 각별하여 영화에서도 잘 알려진 풍경이며 점점이 이어지는 별장들은 거대한 숲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추고 있습니다.  언덕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앙파호텔은 1943년에 카사블랑카 회의의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앙파힐

그러나  베르베르 원주민들은 1068알모라비드 왕조에 의해 정복 될 때 까지 평화롭게 앙파 지역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지요..

14세기에는  마리니드 왕조에 점령당한 후 부터 앙파는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15세기 초기, 이 지역은 해적들을 위한 안전한 은신처 항구로서 알려져 많은 해적들이 활동을 하며 포르투갈의 해상무역을 위협하고 심지어는 포르투갈 연안 마을까지 해적들에 의해 침탈당하자 1468년 포르투갈은 군대를 보내 해적의 본거지를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그후 포르투갈은 1515 폐허가 된 앙파 지역을 이용해 군대 요새를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그러자 자연히 요새주변으로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곳 주변에서 자라났던 그 마을은 포르투갈어로 "하얀 집"을 뜻하는 "카사블랑카"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앙파 언덕 요새에서 바다를 보면 푸른 바다 위에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 지역을 카사블랑카라고 했다고 합니다.

파도 치는 해변

1580년과 1640년 사이, 카사블랑카는 스페인령이 되었다가 다시 포르투갈령이 되기도 하는 등 유럽 식민주의의 영향아래 놓였으나 1755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가 대부분 파괴되자 포르투갈은 이 지역을 완전히 단념하게 됩니다..

그 후 앙파 는 이말리 이븐 샤리프의 손자인 술탄 모하마드 압달라(1756 ~ 1790)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이 당시 이슬람 사원등이 건립되는 등  도시로서 재건이 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유럽과 모로코의 주요  교역 항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때  아랍어로 الدار البيضاء  다를베이다(하얀 집)과 스페인어로 '카사 블랑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직물산업이 왕성하게 일어나자 직물산업에 필요한 원료인 양모의 주요한 공급처가 됨에 따라 카사블랑카는 본격적으로 인구가 늘기 시작 했습니다. (현재에도 모로코의 도시 주변을 나가보면 많은 양의 무리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양모를 수송하기 위해 많은 선박들이 드나들게 됨으로써 많은 유럽인들의 왕래가 많아지자 범죄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지요.

이때 모로코에 범죄인 석방의 대가로 유럽에서 많은 차와 설탕을 모로코 왕실에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 왕실에서 모로코 왕실에 다기세트를 보내게 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앞의 포스팅 사하라에 차가 전래된 이유에서 설명이 있었지요)

 그 후 카사블랑카는 프랑스의 식민지 치하에 놓이게 되고 이때부터 카사블랑카는 항구로서의 규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후 1921년대에는 주변의 판자촌 등을 재개발 하는 등의 도시정비 정책을 폄으로서 110,000명의 인구를 거느리는 최대의 도시가 되게 됩니다.

 시내 모습 (왼쪽으로 쭉 가면 카사블랑카 항구가 있음)

1907 6, 프랑스가 항구 근처에 있는 묘지를 통과하여 지나가는 경편철도 (便)

를 건설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거주자들은 프랑스인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등 대규모 반 프랑스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프랑스는 자국민의 안전과 치안유지 및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구실로  군대를 상륙시켰고 군대는 수 많은 인명을 살상, 도시 파괴를 자행하면서  카사블랑카를 장악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카사블랑카, 모로코를 식민지화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유엔 광장, 법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후 1942년 그 유명한 험프리 보가트,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카사블랑카" 가 헐리우드서 상영됩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카사블랑카에서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헐리우드에서 촬영되었지요. 영화에 나오는 배경은 모두 액자 그림으로 처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주연 배우로 험프리가 아니고 로넬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군대에 징집되는 바람에 험프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영화 '카사블랑카'
1943
년 아카데미 감독상, 각본상,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1943년 워너브라더스 제작. 흑백 영화로 M.커티스가 감독하고 잉그리드 버그먼,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1957년 개봉되었다. 파리가 나치스에 점령되었던 1940년대에 당시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무대로 한 남자의 옛사랑에 대한 미련과 희생을 그린 미국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번에 한번 기회를 잡아서 다시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반전, 반제국주의 영화가 상영되었듯이 1940-50년대의 카사블랑카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의 주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카사블랑카는 제2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의 중요한 전략적인 항구였으며

유럽지역이 모두 전선화 되자  군사작전을 위하여 모든 미국의 항공기가 작전을 수행하는 지역이었던, 규모가 큰 미국 공군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43년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가 전쟁의 진행 상황을 협의하고 논의한  카사블랑카 회담 이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회담 장소인 호텔이  앙파 언덕 위에 있는 호텔 입니다.


카사블랑카의 랜드마크는 하산 2세 대 사원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하산 대 사원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이슬람교 사원으로, 지난 1994년 약 7년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6000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이 모스크는 25000명이 동시에 예배 볼 수 있는 규모이며, 높이가 200m로 세계 모스크 중 가장 높다. 사원 광장은 10만 명 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서 주변에는 도서관 및 부속 건물들을 단장 하고 확장 하는 공사를  아직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건물 전체가 대리석으로 된 사원 외벽에는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듯 유약 바른 푸른색 채색타일이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아라비아 무늬로 모자이크되어 있으며 웅장한 외관뿐 아니라 모로코식으로 장식된 사원 내부 장식도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합니다. 내부 장식을 위해 전국의 공예가 33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정성과 노력이 이렇게 웅장하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한 아라베스크 예술의 극치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여타 중동의 사원이나 다른 건축물들을  치장하는데에도  많은 모로코의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는걸로 보아 모로코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예술적 혼은 고대로 부터 이어져오는 유구한 역사와 장인 정신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어울어져 이루어진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카사블랑카의 역사를 오늘은 공부를 했습니다.
좀 지루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Posted by casablanca
,


Tweets by @casashim